2023년 12월 26일~30일,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이하 ‘공화국’으로 표기) 조선로동당 중앙위원회 제8기 제9차 전원회의 확대회의가 진행되었다. 그 자리에서 김정은 총비서는 남북관계를 새롭게 규정하는 중대한 발표를 했다. 내용은 다음과 같다.
▲남쪽 정부는 더 이상 화해와 통일의 대상이 아님 ▲남북은 동족·동질관계가 아닌 교전 중인 적대적 두 국가 관계 ▲공화국 통일전선부 등 대남 사업 기구 개편 ▲미국과 남쪽 정부의 대북 적대행위 계속 시 남쪽 전 영토 평정(이하 위 4개 항을 ‘12월 규정’ 이라 임의 표기)
파산선고 맞은 남측 통일운동
김정은 위원장의 전원회의 결과 발표는 두 가지 측면에서 충격으로 다가 왔다. 첫째는 남측 통일운동 진영(이하‘우리’로 표기)의 파산선고나 마찬가지라는 점이다.
남쪽에서 본격적인 통일운동이 시작된 것은 2000년 6·15공동선언이후라고 보면 될 것 같다.
분단이후 최초로 남북정상이 만나 회담을 갖고 그간 서로가 추구하던 흡수통일 방침을 공식적으로 파기하고 서로의 체제를 인정하는 가운데 1국가 2체제의 연방제식 통일에 합의한 것이다.
그때로부터 무려 23년이 흘렀다. 흐른 시간만 놓고 보면 남북 사이는 지금쯤은 통일을 목전에 두고 있어야 한다. 강산이 변해도 두 번이나 변했을 시간이니 말이다. 그런데 통일은 커녕 아예 통일이 영원히 멀어지게 생겼다. 일이 이렇게까지 된 배경에는 우리의 안일함과 비주체적인 태도도 크게 기인했다고 봐야할 것이다.
남쪽은 5년마다 선거를 통해 집권자가 바뀐다. 선거에 당선되기 위해 온갖 술수가 판치고 더 많은 사람들을 지지자로 끌어들이기 위해 사생결단식의 선거운동이 판친다. 지난 대선 때도 그랬다. 이 말을 달리 생각하면 어떤 큰 세력이 조직적으로 특정 후보를 밀어줄 경우 당선될 수도 있고 그 반대가 될 수도 있다는 말과 같다.
남쪽 대통령 선거에서 반북친미사대주의 정권이 들어섰을 때 어떤 일이 벌어졌는지를 익히 알고 있는 우리가, 그런 후보를 도태시키기 위해 얼마나 많은 노력을 했는가를 생각해 보면 참으로 갑갑하다. 적어도 6·15공동선언이후부터는 실질적으로 통일을 앞당기기 위해 선거투쟁도 치열하게 전개했어야 했는데 그렇게 하지 못했다. 그러면 나라의 통일을 당 강령의 첫 자리에 놓고 투쟁하는 진보정당이라도 제대로 만들었는가, 그것도 아니다.
매 선거 때마다 우리는 이도 저도 아닌 입장으로 선거에 임하다 보니 민주당이나 지금의 국힘당에도 별 영향력을 끼치지 못하는 초라한 존재로 내려앉고 말았다. 전국적으로 1000개 가까운 통일운동 조직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그 지경이 된 것이다.
우리는 노무현 대통령 취임 초기에 대북송금 특검을 막지 못해 사실상 참여정부 5년 내내 남북 당국끼리 거의 불신 상태에 놓여 있었던 것에 대한 도의적 책임을 느껴야 한다. 노 대통령의 임기 종료가 다가오자 어쨌든 6·15공동선언 이행의 끈을 놓지 않기 위해 두 번째 남북정상 회담이 개최되긴 했지만 이후 이명박 정부가 들어선 후 ‘비핵개방 3000’이라는 막돼먹은 대북정책으로 남북 관계에 살얼음이 보이기 시작했고 천안함 사건으로 완전히 얼어붙게 되었다.
남북관계를 꽁꽁 얼어붙게 한 천안함 사건 조작 의혹에도 우리는 제대로 대응하지 못하는 무기력함을 보였다. 정권의 반북 여론 몰이에 몸을 움츠리고 있었을 뿐, 오히려 통일운동과 무관한 삶을 살아 온 S씨 등 정의감에 찬 몇몇 소수 인사들과 단체가 각개약진(各個躍進) 식으로 정권에 맞서 투쟁했을 뿐이다.
천안함 침몰을 공화국에서 자행한 것으로 보는 것은 굉장한 무리다. 당연히 증거 하나도 없는 상태라 제대로 조사하면 결과가 얼마든지 다르게 나올 수 있다. 그런데도 우리가 왜 그렇게 대응을 못했는지 지금 생각해도 이해가 잘 안 된다.
참고로 나는 이 사건이 조작되었다고 주장한 것 때문에 반북 단체로부터 고발당해 압수수색과 소환조사를 받는 수모를 겪었다. 하지만 그건 별것 아니고 어쨌든 거기에 굴복하지 않고 당시 조사위 관계자들을 조작 혐의로 전원 서울중앙지검과 부산지검에 두 차례 고발을 단행하고 가짜 어뢰 두 개로 조립된 조작 의혹 사건임을 담당 검사 앞에 진술했다.
지금이라도 천안함 사건의 진실을 밝혀 남북관계를 망치는 주범이 늘 그들 반북 세력이라는 것을 국민들 앞에 확인시키는 작업이 필요하다. 그렇게 될 때 한반도 평화통일의 당위성은 국내외로 공감대가 널리 확산될 것이다. 아마도 그런 움직임을 보이지 못하는 것은 남쪽 전체 범위에서 통일운동을 이끄는 제대로 된 상층 지도부가 없기 때문이 아닐까 생각한다.
공화국은 존재 그 자체로 거대하고 강력한 조국통일운동본부다. 그래서인지 몰라도 그동안 우리는 공화국의 태도만 바라보는 수동적 통일운동에 머물렀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그렇게 된 데에는, 누가 뭐라 해도 명백한 핵 강국인 공화국 정부가 미국과의 정치외교적 싸움에서 사실상의 승리를 쟁취하게 되면 평화와 통일의 길이 저절로 열리게 될 것이라는 확신을 갖게 된 것이 오히려 자기의 역량을 제대로 축적하지 못하고 비주체적인 통일운동으로 머물게 된 원인이 아니었을까 판단한다.
참고로 나는 전쟁억지력 측면에서 공화국의 핵무기 역량 강화를 매우 긍정적으로 본다. 그러나 핵무기 역량 강화와 평화통일 문제를 같은 선상에 놓고 생각하기에는 무리가 있다. 그런데 우리 운동 일부에서는 공화국의 핵무기 역량이 강화되면 될 수록 평화통일이 앞당겨 질 것이라는 말이 정설처럼 떠돌고 있기도 하다. 그것을 무비판적으로 받아들이는 사람들이 의외로 좀 있다는 사실이 솔직히 놀랍기도 하다.
그러나 우리가 잘 생각해야 할 것은 공화국이 남쪽의 통일운동을 대신해 줄 수 없으며, 또한 핵무기 역량이 질적·양적으로 아무리 강화된다 하더라도 그것이 평화통일 문제와 비례하지 않는다는 게 김정은 위원장의 ‘12월 규정’으로 확인된 셈이라는 사실을 이번 기회에 분명히 알아야 한다는 점이다.
어느 재미교포 원로학자는 미국은 겉과는 달리 속으로는 공화국의 비핵화를 원하지 않을 것이라고 했다. 물론 비핵화는 불필요하다. 그러나 백보를 양보하여 공화국이 비핵화를 단행한다 하더라도 미국은 또 다른 요구 조건을 걸고 공화국을 괴롭힐 것이다. 항상 적을 필요로 하니까 말이다.
미국은 과거 소련이 해체되어 주적이 사라지자 새로운 적을 만들기 위해 혈안이 되었고, 마침내 중국을 사실상 주적으로 삼게 되었다. 그렇지만 대놓고 중국을 군사적으로 압박할 수 없으니 있지도 않은 공화국의 위협을 들먹이면서, 속셈은 대만 사태를 가정하여 대중국 전쟁연습인 한미연합훈련, 일본 자위대까지 끌어들인 한미일 합동 군사훈련을 하면서, 겉으로는 대북 방어 명분으로 하루가 멀다 하고 훈련을 해댔던 것이다.
그렇게 미국 주도로 군사훈련을 자행하다 보면 실수이든 실수를 가장한 고의든 반드시 한 번은 물리적 충돌 발생이라는 돌발 사태가 터지게 마련이다. 바로 그런 점 때문에 공화국이 항시적으로 긴장을 늦추지 않을 수 없으며, 그러한 상황이 오늘날 공화국을 핵 강국으로 도약하게 만든 것이다. 그러니 공화국 핵개발의 가장 큰 조력자는 다름 아닌 미국인 셈이다. 그런 미국이 이제 와서 공화국의 비핵화를 거론하며 핵핵거리고 있으니 참으로 꼴이 우습다.
결국 미국의 군사패권 정책 때문에 분단 78년째인 오늘날까지 이 땅에는 완전한 평화가 정착되지 못하고 있으며, 남북의 평화적 통일 역시 이루어지지 못하고 있는 것이다.
한편, 그동안 우리의 통일운동 형태는 시절이 좋을 때에는 평양을 방문하여 사적지나 관광지를 둘러보는 것이었고, 남북 공동으로 몇몇 기념식을 갖는 등의 수준에 머물러 온 것이 전부라고 해도 과언이 아닐 것이다. 사정이 그러니 여태껏 한 번도 평화통일 협상을 시도해 보지 않은 것은 어쩌면 당연한 귀결일 수 있겠다.
우리는 4·27선언이라는 위대한 합의문을 앞에 놓고도 제대로 된 통일운동을 벌이지 못했다. 하늘 땅 바다에서 어떠한 군사적 적대행위도 하지 않는다는 문장이 합의문에 들어 있는데, 이는 남북 간에 평화협정을 체결한 것과 같은 것이다. 우리는 이것을 근거로 미국을 얼마든지 압박할 수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그렇게 하지 못했다.
북미 간 하노이 회담이 결렬되고 남북 관계가 냉각되기 시작해도 우리는 4·27선언 국회 비준 동의 촉구 등의 활동을 전혀 하지 않았다. 당시 문재인 정부조차 “6·15공동선언, 10·4선언이 국회 비준 동의를 받지 않아 이명박·박근혜 정부를 거치면서 제대로 이행되지 않았다고 판단해” 4·27선언을 국회 비준 동의를 받으려고 하였으나 지금의 국힘당 계열인 자유한국당 등에서 거부해 비준 동의가 끝내 이루어지지 못했다. 그런 상황에서도 우리는 국회 비준 동의를 위한 어떤 노력이나 투쟁도 하지 않은 것이다.
결국 남북관계는 다시 원점으로 돌아가 버리고, 지금의 윤석열 정권이 들어서서는 군사적 충돌 위기가 가속화 되면서 남북은 더 이상 화해와 협력, 통일의 대상인 동포나 같은 민족이 아닌 교전 상태의 적대적인 두 나라 관계로 전변되었다. 그러니 우리 남측 통일운동은 그동안 제대로 된 성과 하나 내지 못하고 파산선고를 받은 것이나 마찬가지가 되었다고 하는 것이다.
두 번째 충격은 향후 통일운동을 어떻게 전개할지 전망이 불투명해졌다는 것이다.
공화국은 당국가체제다. 조선로동당이 공화국 정부 위에 있고 인민군대는 조선로동당 산하의 무력기관이다. 조선로동당의 령도자는 김정은 총비서이다. 총비서는 조선로동당 군사위원회 위원장이다. 또한 김정은 총비서는 헌법상 직위인 국무위원장이다. 국무위원장은 공화국 정부를 대표하며 군대를 직접 지휘·통솔한다.
국무위원장은 공화국 헌법 104조에 의하여 “다른 나라와 맺은 중요 조약을 비준 또는 폐기” 할 권한이 있다. 그런 권한을 가진 김정은 국무위원장의 ‘12월 규정’으로 남북관계가 더 이상 화해와 통일의 관계가 아닌 교전 중인 적대적 두 나라 관계로 바뀌게 되었으니, 앞으로 우리가 통일운동을 어떻게 해야 할지 막막하지 않을 수 없게 된 것이다.
그러나 걱정이나 실의에 빠져 나라의 통일문제를 외면하고 있을 순 없다. 남북 칠천만 우리민족은 분단 100년을 넘기지 않고 반드시 통일을 이룩해야 할 당위가 있다. 이와 관련하여 나는 이 자리에서 남측 통일운동 진영에 공개적으로 제안을 하나 하려고 한다.
‘시민정부’를 구성하자
윤석열 정부의 무도함이 직접적인 계기가 되어 ‘12월 규정’이 나온 이상 공화국 정부는 앞으로 윤 정부와는 그 어떠한 대화나 접촉도 하지 않을 것이다. 향후 민주당 정부가 들어선다고 해도 공화국의 입장이 바뀌지 않을 것은 명약관화하다.
정부의 역할이 국민의 생명과 안전을 보장하는 것이 첫 번째 임무라고 할 때 현재 대한민국 정부는 없는 것이나 마찬가지다. 일본의 핵오염수 방류를 찬성하고, 미국의 중국 견제·압박 전략에 놀아나 대한민국 군대의 젊은이들과 국민의 목숨을 사실상 그들 패권 놀음의 제물로 갖다 바치려는 짓을 벌이고 있기 때문이다.
그런 미국이 대중국 전쟁을 염두에 두고 벌이는 한미일 군사동맹 추진에 발을 담근 짓은 용서할 수 없는 매국행위다. 정부가 자국민의 안전과 영토 보존을 위한다면 결코 그런 짓을 하면 안 된다. 그러니 정부가 없는 것이나 마찬가지라고 말한 것이다.
윤 정부가 끝나고 제도권의 다른 정부가 들어서도 통일은커녕 지금처럼 미국 꼭두각시 노릇하는 정부가 될 개연성이 높다. 우리에게는 더 이상 그런 정부는 필요 없다. 따라서 우리 통일운동 진영과 시민사회가 할 일은 분명해졌다.
정부가 없는 것이나 마찬가지니 새로운 정부를 세우자는 것이다. 주저 없이 ‘시민정부’ 수립을 선포하자! 시민정부는 일제 강점기 상해임시정부 같은 역할을 해야 한다. 나라 팔아먹는 짓을 하고 있는 현 제도권 정부를 대체하여 앞으로는 시민정부가 공화국과 직접 통일협상을 해야 한다.
공화국 정부 입장에서는 남쪽 정부와는 더 이상 상대하지 않겠다고 천명했으니 향후 남쪽 정부에서 아무리 대화를 제의해도 나설 명분이 없을 것이다. 시민정부가 수립되면 공화국이 남측의 시민정부를 화해와 협력, 통일협상을 해 나갈 상대방 정부로 인정하면 될 일이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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